50대 이상 되는 분들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유신(維新)'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유신의 종말인 10·26 사태를 중2 때 경험했으니, 초중등학교 시절 유신의 광폭(狂暴)을 목격한 셈이다. 매월 1일과 15일 이른 아침에 '조기청소'를 위해 학교에 모이던 그 생경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출석 확인 후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 퍼지는 학교 운동장을 뒤로하며 동네 골목길을 쓸던 경험은, 이후 복무했던 군대의 아침 점호 후 펼쳐지는 일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최악의 기억 중 하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긴 '국가에 대한 약속'을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외운다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인 조르죠 아감벤의 주장대로라면 유신은 의도된 '예외상태(例外狀態)'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예외상태는 국가적 위기가 지속되면서,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이 법률적·헌법적 질서가 아닌 그것의 밖에서 결정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예외상태의 핵심은 국가의 비상 국면이라는 미명하에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의 구분을 일시적으로 폐기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권력 집중이 용인되는 상태이다. 그런데 독일의 법학자인 칼 슈미트는 예외상태와 주권을 직접적으로 관련시킨다. 즉, 주권을 "예외상태에 대한 결정"으로 설명한다. 거칠게 표현하면 국가가 비상상태에서 새로운 헌법 또는 법질서를 창출하는 자가 진정한 주권자가 된다는 것이다.
실상 따져 보자면 유신은 의도된 예외상태의 적자(嫡子)이자 주체였다. 많은 이가 짐작하는 대로, 북한의 잠재적 위협을 과도한 국가적 위기로 대입시키면서, 박정희 자신의 영구 집권을 노렸던 것이 유신이다. 말하자면, 정상적인 제3공화국의 헌정을 중단시키면서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의도적인 예외상태를 조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전권이 위임되는 유신헌법이 탄생하게 되었고 폭압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된다. 여기서 슈미트의 명제에 다시 주목해보자. 1972년의 유신헌법이 당시 권력자인 박정희 1인에 의해서 그리고 1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주권자는 바로 박정희가 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리와 배치되는 셈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현재 또 다른 형태의 예외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박정희의 딸 또는 그 기표였기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분이 만들어 낸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국가를 개인의 수익모델로 보았던 직전의 대통령보다 더 한심한 수준에서 나랏일에 접근했기에 그 대가를 온 국민이 나누어 지고 있다. 흔히 촛불로 대표되는바, 일반 국민은 '이것이 과연 나라인가'라는 분노와 탄식으로 긴 밤을 지새우고 있다. 국회의 탄핵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후안무치로 결박한 대통령은 국민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한 가지 희망은 이 예외상태가 일반 국민에 의해서 종결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지금으로써는 대통령이 탄핵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즉, 45년 전의 예외상태는 권력자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며, 그 종결은 1인에 의한 것이었다. 반면, 지금의 예외상태는 권력자에 의해서 방기된 것이며, 그 종결은 국민에 의해서 이루어질 전망이다. 주권은 예외상태에 대한 결정이라는 슈미트의 언설을 다시 가져온다면, 이번 예외상태의 결정은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측면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 이번의 예외상태가 수습된다고 하더라도,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유신의 흔적이 우리에게 각인된 그 과거에서, 이 나라가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 다른 면에서, 마치 87년의 경험처럼 형식적·제도적 민주주의의 확보로 새 대통령만 선출되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도 든다.
예외상태 지속과 관련한 현대 민주주의 문제점에 대해 아감벤은 비판한 바 있다. 즉, 행정적 편의와 외부 위기 대응이라는 논리로 예외상태가 일상성을 획득하며, 그에 따라 '통치'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가 지속된다는 염려다. 다만 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어 보인다. 박정희와 그의 딸이 만들어 냈던 두 개의 예외상태에서, 앞선 예외상태가 억압과 배제라는 통치 원리를 가졌다면 두 번째의 예외상태에선 그 억압과 배제에 대항할 기회와 의지를 가진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외상태가 종결될 때 그동안 단속(斷續)적이었던 이 땅의 민주주의가 질과 양이라는 측면에서 온전한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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