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딸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서둘러 경남 김해 서상동의 소리작은도서관으로 향한다. 인문학 독서모임 '인문마실'의 소설읽기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인문마실은 김해에 사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인문학커뮤니티이다. 평소 좋아하는 K 형과의 인연으로, 나는 겨울방학 동안 인문마실의 문학 튜터를 맡기로 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떨림을 동반하는 행복한 접속이다. 하지만 낯선 만남에 대한 설렘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더 앞선다. 도대체 무엇을 읽고 이야기할 것인가.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울린다. "어떤 책을 읽고 이야기하면 좋을까요?"라는 K 형의 물음에, 나는 마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선생처럼 응답한다. "겨울방학 동안 함께 읽을 소설집은 '일곱 편의 연애편지'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눌 주제는 사랑입니다."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왜 사랑인가? 아니, 왜 사랑이어야만 하는가? 이 독서모임은 사랑에 미숙한 이들을 위한 '사랑학개론'도 아니고, 또 사랑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심리적 치유 공간 역시 아닌데 말이다. 나는 첫 모임에서 시 한 편을 함께 읽는 것으로 그 배경 설명을 대신했는데, 노혜경 시인의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이 시는 십 년 만에 나온 노 시인의 신작 시집('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에 수록되어 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모든 글자들은 새로 쓴 글씨/ 글자와 글자 사이 빈틈을 찾아 새기는/ 최초의 얼룩// 그렇게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아마도, 첫사랑의 고결함과 순수함에 대한 판타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크게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 될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분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시를 다시 섬세하게 읽고 나면, 이 작품이 첫사랑의 신성함과 숭고함을 훼손하기 위해 쓰여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노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에로스나 값싼 정념의 부산물이 아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나(주체)'와 '타인(타자)'의 관계, 혹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재편하는 변혁적 사건 그 자체이다. 이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다음의 우스갯소리를 참조하면 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종종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거나, '세상이 핑크빛으로 변한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는 분명 비합리적인 심리현상을 표상하는 말이다. 세상이 핑크빛으로 변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농담이 성립 가능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후'의 세상이 질적으로 다른 세계라는 점이 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물성 전체를 변화시키는 적극적 변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과거와의 절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명하는 일상의 봉기, 다시 말해, 사랑은 통속적이거나 수동적인 정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관성적인 삶의 방식을 절단하고 인습적인 생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정동(情動)의 발현이자 폭발적인 사건 그 자체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시인은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고 선언할 도리밖에 없다. 마치 혁명 이후의 신세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물론 시인은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고 향수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사랑의 현재성과 진취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이 개인(간)의 변혁적 가치에만 국한된 개념이나 의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은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연대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결속과 연대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시·공간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사상가 알랭 바디우 역시 '사랑 예찬'이라는 책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라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나'와 '타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 접지를 구성하는 보편성에 대한 탐구 행위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사랑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는 '연대'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 저 참을 수 없는 혁명적 에네르기야말로, 개인과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동(affect)'의 기운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혁명'이라는 말에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혁명이란 속류 현실정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 혁명'이 아니라, 감성 구조의 혁신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통용되거나 유지되어 오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감성체계를 직조해내는 감수성(sensibility)의 탈구축이 '사랑의 혁명'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 공부하고, 또 현재에도 열심히 '사랑'해야 하는 진짜 이유이다. 지금,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보다도 충실한 혁명가일 것이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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