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짬뽕과 다중문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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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짬뽕 한 그릇을 먹어 볼까 하고 사무실 근처 중국집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벽에 붙여 놓은 원산지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한치는 러시아 원양에서 잡아 왔고, 해삼은 필리핀, 소라는 튀르키예, 새우와 오징어는 중국, 나머지는 모두 한국에서 난 것이란다. 짬뽕을 먹으며 생각한다. 여러 나라에서 온 재료들이 이렇게 섞여 하나의 음식이 되는데 우리 공동체도 과연 그럴까.

부산시가 후원하는 ‘2023 부산 인문연대 프로젝트’의 하나로, 유라시아교육원에서도 지구촌 인문학 행사를 한창 진행 중이다. 올해의 주제는 ‘부산 속의 제3 문화-상생의 문화가치 창출을 위하여’이다. 중앙아시아, 아세안, 중국, 러시아, 이렇게 4개 권역으로 나누어 ‘타자’가 우리 공동체 안에 언제부터 어떻게 녹아있는지 살펴보고, 성큼 다가온 다중문화 시대에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해 보기 위한 자리다.

한국 다중문화 능력 아직 미흡

온전한 화합까지는 갈 길 멀어

우리 마음속의 벽 먼저 허물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인식 바꿔야

교육 같은 제도적 보완도 중요

부산시, 이민청 유치 서두르길

특정 사회의 다중문화 능력(multicultural competence)을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 등 세 단계로 구분하여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낮은 단계란 동화주의와 순응주의가 주를 이루고 단일민족혼, 단일문화론이 강조되는 그런 사회를 말한다. 중간 단계란 지배 문화와 주변 문화, 중심과 변두리가 확연하게 구분되고 세계와 세계 사이에 경계가 분명한 그런 사회를 일컫는다. 이 단계에서의 문화 간 상호이해란 주로 전시(exhibition)와 축제(festival)를 말한다. 말하자면, 서로를 신기해하며 마주 서서 바라보는 사회, 그러나 둘이 온전히 하나로 섞이기는 아직 갈 길이 먼 그런 단계이다.

이에 반해 세 번째의 높은 단계란 지배 문화와 주변 문화의 구별이 사라지고 중심과 변두리의 경계가 허물어진 고차원의 다중문화 단계를 말한다. 이 수준에서는 참가자와 구경꾼이 따로 없는 카니발(carnival)이 펼쳐지고, 여러 목소리가 어울려 새로운 합창이 된다. 차별은 없어지고 다양한 차이만 존재하는 역동적인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는 너와 나의 대립이 없고 각자가 각자의 가치대로 존중받는다. 무질서해 보이지만 도시는 활력이 넘치며 도시 곳곳에서 혁신의 기운이 감지된다.

이런 세 가지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 도시의 다중문화 수준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 필자의 판단으론 그저 잘 봐줘야 낮은 단계와 중간 단계의 가운데쯤이라고 할까. 100점 기준으로 치면 50점 정도라고 본다. 다국적 음식으로 변신한 요즘의 짬뽕보다 훨씬 점수가 낮다고 본다.

부산에서도 올해부터 3~5세의 외국인 자녀들에게 유치원 학비를 지원한다고 한다. 동구 서구 영도구 등 인구 위기가 더욱 심각한 지역에서는 외국인에게 장기체류 비자인 ‘F-2 비자’를 발급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며, 그마저도 혜택을 받는 조건이 까다롭고 수혜 대상자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면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남의 삶의 방식을 나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기르고, 창조의 방향으로 우리의 생활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21세기의 국제도시를 꿈꾼다면 시민들부터 먼저 변해야 할 것이다. 결혼 이주민, 외국인 노동자, 외국 유학생에게 우리 쪽으로 오라고 강요하지 말고, 우리가 그쪽으로 먼저 가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담벼락을 우리 손으로 먼저 허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먼저 살게 된 선주민일 따름이다. 선주민부터 시선과 인식과 행동 양식을 바꿀 때 다중문화 국제도시 부산을 향한 사회적 진정성이 확보되리라 본다.

의식과 실천을 달리하려면 제도적 보완이 중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교사가 국제인이 되면 학생들이 국제인이 되고 사회가 국제화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유라시아 지역학 중심의 초중등 교사연수를 제안하였고(부산일보 2023년 10월 26일 자 ‘중앙로365’ 칼럼), 신문을 보고 부산지역 중고교 지리교사 모임인 지리교육연구회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지난주에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다중문화’를 주제로 처음으로 교육연수원에서 만났는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학교 현장의 다중문화 훈련 장치가 너무 허술하다고 할 수 있다. 부산교육청에서 유독 공을 들이고 있는 아침 체조와 방과 후의 귀가 안전,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 가지고는 미래 세대를 준비할 수 없을 것이다.

법무부가 이민청 설립을 서두르고 있다. 이에 빠르게 반응하면서 안산시, 인천시, 충청도의 작은 도시들마저 이민청을 자기 지역에 유치하겠다고 야단이다. 부산일보가 앞장서서 두 달 전에 이 문제를 사설과 1면 기사로 공론화하였는데, 정작 부산시에선 반응이 없다. 이민청은 시의 새로운 활력과 발전 전략에 관한 중차대한 문제인데 지금껏 뭐 하고 있는지, 그것도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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