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도래했다. ‘미투(#MeToo)’라는 강렬한 변혁의 물결이 남성 중심 문화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우리 사회의 적폐를 강타하고 있다.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계급적 착취와 불합리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면, ‘미투운동’은 한국의 가부장주의가 내장한 위계 구조와 폭력성을 타격하는 젠더 봉기이다.

미투운동의 사회적 파급력이 이토록 큰 이유는, 이것이 여성의 삶과 억압적 문화를 해방하는 협의의 젠더 정치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에서 배제되거나 추방된 약자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마이너리티 정치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미투는 발화되지 못한 주체의 목소리를 발굴하는 고고학적 행위와 다르지 않다.

타자와의 만남을 중시하는 미투의 사상적 기반은 ‘환대의 윤리’이다. 굳이 자크 데리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타자를 성심성의껏 마중하는 환대의 과정에는 어떤 조건도 고려될 수 없다. 미투운동이 사법적 논리나 객관적 사실 규명보다, 사회적 약자의 구조 신호에 더욱 예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정한 환대는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자기 성찰과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탓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이가 미투운동의 변혁적 가치에 공감하고 이를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혼이 난 적이 있다. 지식인이라고 칭하는 남성들이 계급이나 빈곤, 민주주의나 양심을 운운하면서도, 정작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미투운동과 젠더 어젠다(gender agenda)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예리한 지적이지만, 정작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런 식의 매서운 비판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남성이 미투운동의 가치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미투는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이런 칼럼을 쓰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나 도덕적 사면권을 부여하는 위선적인 행동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학부 시절, 노혜경 시인의 ‘한국여성문학’이라는 강의를 계절학기 수업으로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휴식 시간에 짬을 내, 남자는 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지 물어보았다. 시인은 남성도 충분히 공정하고 진보적인 젠더 의식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남자들이 훌륭한 젠더 의식을 갖거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을 실천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답하였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이란 걸 하게 되면서 그 말의 취지를 실감할 때가 적지 않다. 이 오래된 에피소드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젠더 의식이나 타자에 대한 윤리 인식과는 별개로, 남자들 역시 가부장제의 기득권을 용인하거나 젠더 폭력에 침묵해야 하는 경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남성은 대부분 불합리한 가부장제 규율에 무감각하도록 훈육당해 온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이론을 귀동냥한 깜냥으로, 다른 남성보다 조금 나은 젠더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많은 남성은 여전히 가부장주의의 폭력적 공모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해하지 말 것은, 미투운동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 쟁투나 정체성 대결이 아니라는 점이다. 페미니즘 비평가 주디스 버틀러는 주체의 새로운 삶은 사회·제도적으로 등기되어 있는 견고한 젠더 정체성과의 불화(trouble) 속에서 다시 입안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미투운동의 사회 변혁적 지향성이 여성과 남성에게 기입되어 있는 젠더 정체성의 와해, 다시 말해 그 고약한 근본주의적 성차(性差)를 해체하는 노력으로부터 정초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초적 기득권과 비인간적 여성 혐오에 저항하는 남자는 상징적 거세를 당하거나, 주류 남성 사회에서 ‘유별난 녀석’으로 취급받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하지만 남성이 가부장적 젠더 정체성을 교란하고 차별적인 성역할을 전복하는 혁명의 자원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성에게도 ‘미투’는 지배적 헤게모니에 틈을 내는 문화적 역린이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여성과 남성이 젠더 혁명의 동지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 지점에서 융기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남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반역’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순간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가 포기하거나 폐기해야 할 ‘남성 기득권의 목록’을 함께 기록해 나갈 때이다. 어제의 병폐와 분연히 결별하고 새로운 ‘오늘’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 내 안의 ‘괴물’과 불화하면서, 한 걸음 더 인간의 길로, 인간의 길로.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